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 (문단 편집) == 양민이 아닌 공산주의자? == 한국군을 옹호하는 일각에서는 베트남에서의 전쟁 범죄들을 논하며 살해당한 지역 주민들이 '[[양민]]', 즉 양심적이고 순수한 민간인이 아닌 '[[공산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민간인이 아니므로 충분히 군사 작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게릴라가 매우 많았던 "꽝나이 성" 과 "꽝남 성"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다. 해당 지역은 게릴라에 협조하는 친게릴라 성향이라서 작전지도에 핑크색으로 칠해져 있을 정도로 게릴라 준동이 심했다. 미군들이 "핑크빌"[* 공산주의자 마을, 해방구]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라이프지, 1969년 12월 5일, [[https://books.google.co.kr/books?id=mFAEAAAAMBAJ&pg=PA39&dq=pinkville&hl=ko&sa=X&ved=0CFwQ6AEwCWoVChMI9aGOlNvLxwIVw4yUCh0Xpgs5#v=onepage&q=pinkville&f=false|#]]][* 유명한 "[[미라이 학살]]" 사건이 일어난 곳도 꽝나이 성으로 미라이 사건을 벌인 켈리의 소대가 포함된 중대는 제대로 된 교전 한 번 없이 부비트랩만으로도 부대원의 상당수가 전사 피해를 입은 후,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꽝나이, 꽝남을 비롯한 베트남의 중부 동해안은 베트남 공화국에서도 인정하듯 혁명가(공산주의자)들의 산실이라고 불릴 정도로 공산주의 성향이 강했으며 베트콩과 북베트남의 지역 장악도가 심했다. 게다가 꽝나이 성은 라오스를 타고 내려오는 호치민 루트가 처음으로 남베트남의 내륙 평야지대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만큼 게릴라는 많았고 게릴라에 협조하는 주민은 사방에 널려있었다. 권헌익 교수도 1995년 하미라는 마을의 전쟁 당시 이장과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장의 말로는 전쟁당시 하미에는 베트콩들은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조사를 해보니 공산주의자들이 아주 많았고 베트콩과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또한 Ha Gia 라는 마을의 여성이 베트콩 협력자로 추정되어 체포할 때 그녀는 베트콩이 아니라고 했지만 집 벽뒤에 숨겨둔 카빈 소총 한정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 현지인들을 믿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주둔군과 현지인들과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질 수 있다. 그의 논문의 따르자면 학살이 일어난 지역들은 대다수 이미 한국군이나 미군, 혹은 월남군과의 교류가 있던 마을이었고 여기서 갑자기 전세가 뒤집히거나 주둔군이 손실을 입으면 그 마을들이 제일 먼저 베트콩 협력자의 낙인이 찍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주둔군들은 여부가 사실이든 아니든 배신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베트콩 협력 마을이 맞는지 아닌지 사실 여부를 떠나서 학살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역사적 사실이며, 전쟁 도중 민간인과 게릴라의 구분이 어렵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민간인 살해는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